정보공개센터 김예찬 활동가가 은평시민신문에 연재하는 정보공개 칼럼입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그녀가 말했다’는 2017년 헐리우드의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 사건을 파헤쳐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성추행 사건을 보도한 기자 메건 투히와 직장 내 성차별 문제를 오래 취재한 조디 캔터는 어느 날 헐리우드의 거물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실을 제보 받게 됩니다. 와인스틴에 대한 취재에 나선 두 기자는 곧 보도를 은폐하려는 압력에 직면하게 됩니다. 피해를 당했던 영화사 직원은 기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증언을 거절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낙인, 보도를 하더라도 바뀌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증언을 막습니다. 과거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은 하비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에게는 하비 측의 입막음 전화가 걸려옵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와인스틴 사건에 대한 탐사보도 과정을 큰 줄기로 삼지만, 개별 사건을 다루는데 그치지 않고 왜 일터에서 성폭력이 반복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은폐되는지 침묵의 구조를 파헤칩니다. 극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성범죄 사건의 녹취록을 활용하고 실제 피해자를 자신의 역할로 등장시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탐사보도의 과정을 따라가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게 되는 영화이지만, 특히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비 와인스틴의 영화사 미라맥스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사건을 취재하던 메건 투히는 EEOC(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의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EEOC는 미라맥스에 대한 성폭력 신고가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특정 회사에서 얼마나 성폭력 사건이 많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공개할 수 없는 기밀사항이라는 이유죠.
메건 투히는 되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여성 구직자도 고용주가 얼마나 성폭력 사건을 저질렀는지 기록을 조회할 수 없겠네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 안하세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관이, 정작 그 보호에 필요한 정보의 공개는 금지하고 있다니.”
EEOC는 성폭력, 성차별을 비롯해 직장 내 차별을 금지하고, 조사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연방기관입니다. 그런 기관에서도 어떤 기업에서 얼마나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죠. 구직자들은 자신이 일할 직장이 폭력과 차별 없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어떤 차별과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역시 일터에서의 폭력과 차별이 적지 않은 나라입니다. 여성가족부가 770개 공공기관과 1760개 민간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성희롱 실태조사(2021) 결과에 따르면 4.7%에 달하는 조사 대상 사업체에서 3년 이내에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벌어졌다는 응답이 나왔습니다.
2020년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45.5%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하구요.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나 징계를 접수 받아 처리한 건수는 1년에 1만 건이 훌쩍 넘습니다. 직장에서 벌어진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기업에서 어떤 사건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는 공개 되지 않습니다. 기업의 경영이나 영업에 관련한 비밀이라거나, 기업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정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에 대한 정보공개는 좀처럼 확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투자자를 위해 기업의 재무정보를 공시하고, 소비자를 위해 기업에서 생산한 상품에 대해 정보를 공개하는 경우는 있지만, 일하는 노동자를 위해 기업의 안전과 평등, 고용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근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이슈 등 비재무적 요소에 대해 정보공개를 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지고 있고, 실제로 일부 투자자들은 이러한 정보를 활용하여 회사를 평가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ESG 공시의 항목은 제한적입니다. 그뿐 아니라 정작 노동자들이 알고 싶은 정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기업 재직자들이 기업정보를 공유하고, 리뷰하는 잡플래닛이나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같은 서비스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보다 평등하고 안전한 기업 문화를 원하고,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경험자들의 주관적인 평가에 의존하게 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서 어떤 산업재해가 일어나는지, 직장 내 괴롭힘은 없는지, 성차별 문제가 존재하는지, 부당한 해고는 없는지 등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민 대다수는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집행하라고 정부가 있는 만큼, 그 보호에 필요한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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