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공개사유] 중대재해 조사보고서 공개가 해낼 수 있는 것

opengirok 2022. 10. 12. 13:43

 

27일 서울시 종로구 현대건설 본사 앞에서 산재사망대책마련 공동 캠패인단,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정의당 강은미 국회의원 주최로 열린 2022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참가자들이 현대건설 본사 앞에서 헌화한 국화꽃이 놓여 있다. 2022.04.22 ⓒ민중의소리

정보공개센터 김조은 활동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부분적으로 시행된지 8개월 남짓, 윤석열 정부에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 개정을 예고했다.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을 최고경영자가 아닌 CSO(안전보건최고책임자) 선에서 질 수 있도록 명시하고, 경영자가 지켜야할 ‘안전보건 관련 법령’도 10개로 축소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의 책임을 강화해 중대재해를 근본적으로 줄이고자 하는 법의 취지와 전적으로 배치되는 방향이며, 경영자의 안전관리에 대한 책임 회피를 용이하게 할 수 있어 우려가 크다.

중처법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자명하다. 안전한 일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일하는 개별 행위자의 책임을 넘어 ‘구조적인 책임’과 그 변화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의역 사고와 김용균 사건을 지나도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지금과 같은 구조 속에서는 줄일 수가 없다.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기업이 노동자의 보건안전에 투자하지 않고, 하도급과 외주하청으로 사람을 쉽게 쓰고 자르는 구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인 1조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안전매뉴얼과 안전장비는 배부른 소리가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더 많은 이윤’에 맞추어진 지금의 구조를 유지할 때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 그리고 한편으로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기업의 총수, 경영자다. 그래서 우리는 경영자에게 보건안전에 훨씬 더 많이 투자하고 하도급 시에도 산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지원하는 등 지금의 산재발생 구조를 바꾸기 위한 조치들을 시행할 책무를 지워야만 한다.

그런데 중처법을 통해 기업의 총수를 실질적인 책임자의 위치에 세우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에, 기업과 사회의 ‘구조적 책임’을 드러내고 반복되는 산재의 구조를 바꿔나가기 위해 중요한 것이 또 있다. 현장에서 일어난 재해들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를 조사한 ‘재해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내실화하는 일이다.

노동자가 사망하는 등의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산업안전보건법 제56조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원인 조사’를 실시한다. 조사는 재해에 이르게 된 경위와 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동일·유사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는 데에도 그 의의가 있다. 통상적으로 중대재해조사는 근로감독관과 안전보건공단의 보건안전 전문가가 함께 진행하는데, 현장에 방문하여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안전보건공단 전문가가 ‘재해조사의견서’를 작성한다.

구의역 사건(왼쪽)과 김용균 사건 재해조사의견서. 비공개가 원칙인 탓에 각 사건 대책위들도 재해조사의견서를 보지 못 하고 조사를 마무리지었다. ⓒ민중의소리



그동안 재해조사의견서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해당 의견서가 사업주의 산업안전법 위반을 기소할 때 핵심 자료로 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사건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유족에게도 ‘수사자료’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소가 완료되고 법원 판결이 이루어진 후에도 사업주나 당사자와 관련한 민감정보가 포함된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실의 자료제출 요구를 거치지 않는 이상 재해조사 의견서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아왔다. 동종·유사사고의 예방과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작성되는 ‘공공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판검사들, 매우 한정된 전문가들만이 의견서의 내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별 사건에 대한 조사과정에 대해 신뢰성을 담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해도 이 사례들이 사회적인 지식과 교훈으로 축적될 수가 없다.


중대재해의 원인과 경위를 밝히는 재해조사 의견서
수사자료라는 이유로 피해자 유족에게도 공개되지 않아
정보공개 의무화는 산안법 개정안, 하루 빨리 처리돼야


더 큰 문제는 재해조사의견서가 수사자료로 비공개되니 보고서 자체가 기소를 판단하는 요건에만 치중해 작성되고 재해의 원인을 심층적으로 밝히는 데에는 소홀하다는 점이다. 현행 의견서는 단순 기술적 원인이나 ‘관리감독 강화’ 등으로 귀결되는 표면적 원인은 제시하더라도, 현장에서 안전지침의 실질적인 시행을 위해 개선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중대재해 반복된 이유, 첫 조사부터 부실했다, 2021.08.19 민중의소리 기사]

이 때문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노동안전, 시민사회단체들은 일찍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더불어 ‘재해조사의 결과’를 제대로 공개할 것을 요구해왔다. 재해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여러 전문가와 노동자들, 시민들이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과정이 전제되어야만 중처법으로 명시된 기업의 ‘구조적 책임’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조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사회적으로 축적될 때에 재해조사 제도가 보다 내실있게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산재를 겪게 된 노동자들과 유족들, 그리고 동료 노동자와 시민들이 더는 이러한 사고를 겪지 않도록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알 권리는 절실하다. 어쩌다 사고를 겪게 되었는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작업환경의 위험을 파악하고 대응하기 위해서, 이윤보다 노동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직장의 안전 및 재해 조사 정보에 더 많이 접근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반갑게도 국회에서 지난 9월 23일 중대재해 발생시 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3개월 이내에 공표하도록 하는 취지의 산업안전법 개정안(노웅래 의원 등 17인)이 발의되었다. 9월 28일에는 전·현직 노동자들에게 사업장의 안전보건자료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산업안전법 개정안(우원식 의원 등 17인)이 뒤이어 발의되었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법안이 차일피일 미뤄지지 않고 하루 빨리 통과되기를 바란다. 일하던 누군가가 다치고 사라져간 아픔을 담은 정보들이 세상으로 나와서, 기업 살인의 구조를 바꾸는 단초가 될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정보공개센터가 연재 중인 민중의소리 '공개사유'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