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예산 잘못 쓰이지 않도록 국회의원 행동강령 마련해야

opengirok 2022. 10. 6. 10:28

 

정보공개센터 김예찬 활동가가 은평시민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정보공개 칼럼입니다.


 

제가 일하는 정보공개센터는 2017년부터 뉴스타파, 함께하는시민행동, 세금도둑잡아라 등 언론과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국회의원들의 예산 사용 내역을 분석하고, 문제가 있는 사용 내역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7월, 21대 국회의원들의 입법및정책개발비 내역 자료 열람과 스캔 작업을 위해 국회로 향했습니다. 

무더기로 쌓여있는 국회 입법및정책개발비 증빙자료


국회의원 한 사람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책정된 예산은 연간 1억원이 약간 넘는 수준입니다, 그 중에서 대략 4500만원 가량이 입법과 정책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으로 분류됩니다. 그 중에서 약 2000만원이 의정활동을 홍보하고, 자료를 발간하는 등의 비용으로 쓰입니다. 나머지 2500만원은 입법및정책개발비라는 이름으로 세미나, 토론회, 공청회, 간담회 등의 행사를 열거나, 정책연구용역 보고서를 내는 등의 예산입니다.

국회의원 300명이 사용한 2년 간의 입법및정책개발비 내역은 대략 150억원. 이 150억원의 사용 내역을 정보공개 청구하고, 열람 날짜와 방식을 협의하는데 석 달이 걸렸고, 여덟명이 달라붙어 영수증을 하나 하나 스캔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2020년, 뉴스타파가 보도한 20대 국회의원들의 예산 오남용 사례


일주일 내내 스캔을 하느라 고생하면서도, 막상 살펴보면 별다른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020년, 20대 국회의원들의 예산 오남용 사례가 밝혀져 문제가 되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입법및정책개발비 내역을 전수 조사한 결과, 다수의 정책연구용역 보고서가 표절 보고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료집 인쇄 수량을 허위로 부풀려 예산을 받아놓고, 이 돈을 인쇄업체를 거쳐 다시 돌려 받는 '돈 세탁' 사례도 발각 되었습니다.

정책개발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예산으로 국회의원 개인의 치적사업을 홍보하거나, 선거를 대비한 여론조사를 진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표절과 허위로 얼룩진 예산 사용이 드러난 국회의원이 71명. 전체 국회의원의 1/4에 달하는 수였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이 망신을 당했고, 사비를 들여 다시 예산을 국회로 환수하기도 했습니다. 21대 국회는 20대 국회를 반면교사 삼았을테니, 이번에야 말로 큰 문제가 드러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국회의원들의 예산 오남용은 여전했습니다. 이전에도 문제가 되었던 보고서 표절이나 홍보성 여론조사는 물론이고, 먹자판 워크샵을 다녀오거나 보고서를 재하청 주는 경우도 드러났습니다.  정치인이 세운 싱크탱크에 예산을 몰아주거나, 정책개발비로 아동용 그림책을 수백권 구입해 선물로 나눠준 사례도 있었습니다. (뉴스타파 보도 링크) 20대 국회가 정책개발비 예산 오남용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전례에도 불구하고, 21대 국회 역시 문제가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문제가 되었으니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순진한 기대였던 셈이죠. 20대 국회의 예산 오남용 사례가 드러난 이후, 국회사무처는 그동안 제대로 공개하고 있지 않던 정책연구용역 보고서를 사전공개(링크)하여 투명성을 강화했습니다. 국회사무처가 제작한 의정활동 지원 안내서(링크)에도 ‘언론과 시민단체로부터 예산 내역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집행에 주의해달라’고 친절히 안내되어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 보고서 내용이나 예산 집행 내역을 살펴보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회의원들은 왜 이런 문제를 반복하는 걸까요?

“걸려도 불이익이 없으니까” 이런 일이 반복되는게 아닐까요? 일반 공무원의 경우, 예산을 원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공무원 행동강령에 ‘예산의 목적 외 사용 금지’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여비, 업무추진비 등 공무 활동을 위한 예산을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여 소속 기관에 재산상 손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지방의회의원 행동강령에도 동일한 조항이 있고, 국회공무원 행동강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행동강령을 위반할 경우, 공무원이든 지방의원이든 징계 근거가 됩니다. 목적이 정해진 예산을 제 맘대로 썼으니,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이 당연한 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국회공무원 행동강령’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국회의원 행동강령’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참여연대가 정리한 역대 국회의원 징계 사례


국회의원도 물론 징계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국회법에 징계에 대한 조항이 있고, 국회의원 윤리강령이나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 등이 정해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윤리강령은 구체적인 징계 근거 조항이 없는 선언적인 문구에 불과하고, 국회의원 윤리실천규범 역시 공무원 행동강령에 비하면 매우 간소하게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나열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산의 목적 외 사용금지’ 나 ‘이권 개입 금지’ 같은, 당연하게 있어야 할 것 같은 내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금 들인 보고서가 표절로 얼룩지거나, 허위 서류를 꾸며 ‘돈 세탁’을 하더라도 국회의원이 징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징계안 자체가 상정되지 않습니다. 사실 국회의원에 대한 징계 제도 자체가 거의 사문화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참여연대의 2021년 리포트(링크)에 따르면, 1948년 제헌국회 이래 7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국회의원 징계안이 가결된 사례가 겨우 6건에 불과합니다. 아나운서들에 대한 성희롱 발언으로 강용석 전 의원에 대한 징계안이 가결된 2011년 이래, 10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징계가 이뤄진 사례가 전무합니다.

정책 개발에 쓰라고 책정되어 있는 예산을 제 마음대로 써도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고, 걸리더라도 다시 갚으면 그만. 이만한 일로 징계를 받지도 않으니,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결국 제대로 된 행동강령을 만들고, 잘못을 징계하는 사례가 만들어져야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그런 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