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현대판 사화’ 부른 국가정보원

opengirok 2013. 7. 3. 13:37


국정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공개는 한국 현대사에 대표적인 ‘현대판 사화’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 경향자료사진


전진한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전문을 공개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우리 현대사에 대표적인 ‘현대판 사화’로 기록될 것이다. 우선 이 사건으로 어떤 파장이 생길지 분석해 보자. 우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이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은 대통령 재직 시 민감했던 각종 기록을 남겨두면 최대 15년까지 보호해주고, 이후 기록을 공개해 역사적 판단을 받겠다는 취지에서 2007년에 만든 제도이다. 이전까지 사료적 가치가 있는 대통령기록은 사실상 생산되지 않았고, 생산되었더라도 폐기하거나 외부로 반출되었다. 이런 문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을 여야 합의로 제정했고, 이 법안에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법적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재직시절 민감한 대통령지정기록 36만건을 생산했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록은 현 대통령기록관에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잘 보관되어 있다. 문제는 국정원이 2007년 회담 당시 기술적 지원 차 녹취하여 ‘회의록’을 작성해 따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 기록은 대통령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는 기록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를 공개하면 대통령지정기록물이 해제된 효과를 발휘한다. 법에는 대통령지정기록물 해제 권한은 기록을 생산한 전직 대통령이나 재직 국회의원 200명 이상 동의, 고등법원장의 영장이 있어야만 가능하지만 국정원은 이를 무시하고 공개를 강행한 것이다. 이는 향후 대통령지정기록물을 남겨도 보호되지 않는다는 전례를 남기게 되어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가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실상 ‘현대판 사화’가 발생한 것이다. 기록이 있어야 평가도 가능하다. 기록 자체가 남지 않으면 후세대는 이 시대를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국정원은 본인들이 작성한 기록이기 때문에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아니고 비밀기록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주장은 어불성설이지만 설사 받아들여도 문제는 더 커진다. 외교 관련 비밀기록은 외교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대부분 30년이 지나야 공개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생산된 지 6년밖에 지나지 않은 기록을 일반기록으로 재분류해 만천하에 공개해버렸다.


이 같은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한 후유증을 준다. 우선 정상회담 상대국의 신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외교 정상회담은 철저히 서로 비밀을 유지한 채 협상이 진행되고, 그와 관련된 합의문도 서로 양해 하에 진행된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중요한 협상 자체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가의 비밀을 보호해줘야 할 국정원이 국가의 비밀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나라를 어떻게 믿고 협상에 임하겠는가? 대한민국은 전세계에 국가정보기관이 나서서 비밀을 폭로하는 나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은 스스로 살기 위해 너무 큰 사고를 쳐버렸다. 여야가 이런 민감한 기록으로 정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균형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스스로 폭로자 역할을 자처했으니 도대체 비밀기록은 누가 지킬 것인가? 이 사건이 악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