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계사사화, 정부 3.0, 서울기록원

opengirok 2013. 7. 2. 10:21

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신동호 이사 (경향신문 논설위원)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사태를 조선시대 무오사화와 같은 ‘현대판 사화’라고 해서 계사사화(癸巳史禍)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긴 부끄러운 사건이라는 걸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자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사달이 난 이번 사태와 별도로 그동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적인 잘못이다.


정치적 공방은 언젠가 끝날 것이다. 계사사화를 일으킨 사람이나 조직이 건재할 수도 몰락할 수도 있다. 역사적 평가가 조만간 또는 먼 훗날 내려질 수도 있다. 이번 ‘기록사태’도 비슷한 역사적 전철을 밟을 것이다. 그런 정치적 시시비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기록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기록이란 게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즉 어떻게 보존·공개·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합리적 논의와 합의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기록은 당대의 삶을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사료이기 이전에 당대의 삶을 증거하는 수단이다. 후대와의 소통이 아니라 당대와의 소통이 일차적 목적인 것이다. 공기록은 국정의 모든 것이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빠짐없이 기록하고 엄격하게 관리해서 국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국가의 재부(財富)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박근혜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정부 3.0’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의 ‘열린시정 2.0’이나 다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바탕한 21세기형 소통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 3.0이나 열린시정 2.0이나 철저한 기록 관리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이다.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그것이 표방하는 개방·공유·소통·협력은 무의미하다. “기록하지 못할 일은 하지 마라”는 신념으로 일하고 기록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보고 후임 정권이 어떻게 처신할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오사화 후 사관은 왕의 말만 받아쓰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왕의 말마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사고(史稿)를 정리하니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는 게 실록의 기록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어기고 그 취지를 훼손한 이번 기록사태의 후유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와는 약간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서울시 기록도 ‘불법적으로’ 관리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영구기록물관리기관(아카이브·Archives)이 없기 때문이다. 2006년 전면 개정된 공공기록물관리법은 서울을 비롯한 특별 및 광역 시·도의 경우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을 설치·운영하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를 지킨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설인 아카이브는 도서관·박물관과 함께 3대 문화시설로 불린다. 최근 시대어처럼 회자되는 열린 정부, 열린 시정, 창조경제 등의 핵심 기반이자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의 알 만한 나라 수도급 도시 가운데 아카이브가 없는 곳이 유일하게 서울이란 사실은 자랑스러운 기록문화의 전통을 물려받은 나라의 치부 중에서도 치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울·충북·경기 등 일부 시·도가 아카이브 설치에 나서고 있고, 그 가운데 서울의 진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 부지에 2016년 완공을 목표로 서울기록원(가칭)을 건립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서울기록원이 들어서면 서소문 별관, 신청사, 경북 청도 문서고 등에 보관된 종이기록과 백업 수준으로 보관하는 연간 생산량 400여만건의 전자기록은 물론 아카이브가 없는 25개 자치구와 교육자치단체의 기록까지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민생과 관련한 정보 습득, 시정 참여, 협치, 문화 콘텐츠 이용 등이 한층 용이해지고 고도화되는 것이다.


나쁜 소식도 있다. 예산·조직 문제와 기록에 대한 이해 부족이 걸림돌이다. 2007년 오세훈 전 시장이 추진했던 서울기록원 건립 계획이 유야무야된 것도 그 때문이다.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복지비용 분담을 강하게 요구하는 현실이어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을 새로 펼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일부 시의원이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을 주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후순위로 미루다 보면 예전처럼 또다시 표류할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중대한 문제다. 이번 기록사태를 생산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독립기관으로 운영되는 미국 정부 아카이브인 국립기록관리처(NARA)의 모토 가운데 하나가 “민주주의가 여기서 시작된다(Democracy starts here)!!”이다. 이런 문구를 서울기록원에서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정보공개센터 이사이신 신동호 경향신문 논설위원께서 쓰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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