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공개센터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그 정보가 알고싶다] 시리즈입니다.
지난 21일, 노조법 2·3조 개정안(별칭 '노란봉투법')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사용자의 정의를 넓혀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과 교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쟁의행위의 사유를 '근로조건의 결정'에서 '근로조건'으로 수정하여 합법 파업이 가능한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동안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기업의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에 고통받았던 것을 감안하여 법원이 배상의무자의 귀책 사유에 따라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의 책임 범위를 정하도록 했습니다.
노조법 2·3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2013년 12월, 한 시민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쌍용차 노조에 대한 47억 원 손해배상 판결에 분노한 한 시민이 4만 7000원을 기부하면서 시작된 '노란봉투법' 제정 운동은 9년이 지나 노조법 2·3조 개정을 요구하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유최안의 국민동의청원에 5만 명이 응답하며 급물살을 탔습니다.
아쉽게도 실제 환경노동위를 통과한 법안은 유최안과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가 요구한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막대한 손해배상 청구로 노동자를 옥죄어서는 안 된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국회를 움직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국민동의청원' 제도입니다. 헌법 제26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청원에 대하여 심사할 의무'를 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청원이란 국민이 피해의 구제, 부당행위 시정, 법령의 제·개정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원의 권리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 존재한 헌법상의 기본권입니다.
국회 역시 국가기관인 만큼 청원의 대상이 됩니다. 일반적인 공공기관의 경우, 누구나 어렵지 않게 청원을 접수할 수 있지만, 법을 만드는 것과 직결되는 국회청원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상당히 높은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1960년까지만 하더라도 청원을 하려는 사람은 국회의원 3인 이상의 소개의견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를 의원소개 청원이라고 하는데요, 여러 명의 국회의원을 만나 의견서까지 받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겠죠? 4.19 이후 국회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의원 한 사람의 소개의견서를 받아도 청원이 가능하도록 바뀌었습니다. 그 직후 국회청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죠.
하지만 기나긴 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국회의 존재감은 줄어들고 국회청원제도는 잊혀 갔습니다. 국회의원을 만나 소개의견서를 받아야 하는 절차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청원 건수도 점차 줄어, 16대 국회에서 765건에 달했던 국회청원은 19대 국회에 이르러 227건에 불과할 정도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청원은 헌법상의 권리임에도 정작 국민들의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21대 국회 국민동의청원 중 채택은 한 건도 없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전자 청원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의 사례를 참고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또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자 2019년부터 드디어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의원의 소개 없이도,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30일 이내에 5만 명의 시민들에게 동의를 받는다면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본래 10만 명이었던 기준이 국회규칙 개정으로 2021년 12월부터 5만 명으로 하향되었습니다).
국민동의청원의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청원을 하면, 먼저 30일 이내에 100명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합니다. 그중에서 청원법과 국회법 등에 따른 청원 요건을 충족한 청원들이 동의 대상 청원으로 공개됩니다. 이 중에서 다시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는 청원이 공식적인 청원으로 접수됩니다.
21대 국회가 시작한 이래 지난 3년간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접수된 청원은 모두 52건. 하지만 접수가 되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갑니다.
청원이 상임위에 안건으로 상정되어, 소위와 상임위를 통과하고, 법사위의 문턱을 넘어, 마지막으로 본회의 의결 절차를 거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습니다. 21대 국회에 접수된 52건의 국민동의청원 중에서, 본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채택된 청원은 아직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물론 청원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에 관한 청원은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에 반영되어 폐기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노조법 2조·3조 개정에 관한 청원이나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관한 청원은 본회의에 부의하지는 않았지만, 청원의 취지를 고려하여 유사한 개정안을 올리는 경우입니다. 여성가족부 폐지에 관한 청원처럼 청원의 내용이 적정하지 않아 폐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청원을 반영하거나 폐기하는 등의 처리 절차 없이 단순히 위원회에 계류하여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청원이 절대다수라는 점입니다. 52건의 국민동의청원 중 이렇게 처리되지 않고 계류 중인 청원이 47건입니다.
국회 임기 만료 전날까지 '심사 연장'
특히 문제가 되는 경우가 바로 '심사 연장'입니다. 계류 중인 청원 중 상당수가 '2024년 5월 29일까지 심사를 연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24년 5월 29일은 21대 국회 임기 만료일 바로 전 날입니다. 사실상 임기가 끝날 때까지 청원에 대해 심사하지 않고 자동으로 폐기시키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습니다.
5만 명의 뜻을 모아 청원을 접수해도, 국회에서 제대로 심사하지 않는다면 결국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폐기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요? 국회가 의도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는 걸까요?
먼저 국회가 제대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많은 법률안이 쏟아지고 있는 '입법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20년 전인 16대 국회 시절 4년 동안 국회에 접수된 법률안은 2507건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임기 만료 등을 사유로 폐기된 법률안은 882건이었습니다. 이후 국회에 접수되는 법률안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17대 국회에서는 7489건, 18대 국회 1만 3913건, 19대 국회 1만 7822건, 20대 국회에 들어서는 무려 2만 4141건의 법률안이 접수됩니다. 21대 국회는 아직 3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2만 건이 넘는 법안이 접수되어, 20대 국회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회의원 수는 300명을 넘지 못합니다. 의원 수는 비슷한데 심사해야 하는 법안의 수는 10배가 늘었습니다. 2만 건이 넘는 법안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고 하나하나 챙기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찬성표를 던져 통과시킨 법안의 독소 조항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개정에 나서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집니다.
이렇게 과도하게 많은 법안의 홍수 속에서, 아무리 국회의원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발의하지도 않은 청원까지 신경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의원소개청원의 경우 주로 지역 주민들과 연고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불특정 다수가 참여하는 국민동의청원은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워집니다.
5만 명의 서명 자체가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주제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정치인이 힘을 쏟아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이나 중대재해처벌법처럼 관심을 모으면서 입법으로 이어진 사례들도 있구요. 그러나 이런 경우는 유가족과 노동·시민사회가 장기간의 입법 캠페인을 펼치면서 사회적 여론을 모으고 국민동의청원을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국민동의청원 무력화하는 꼼수
▲ 21대 국회에 접수된 국민동의 청원 일부. 녹색 표시가 계류 중인 청원이다. ⓒ 국회
오랜 기간 동안 국회에 계류 중인 국민동의청원을 살펴보면 단기간에 이슈몰이를 했지만, 계류 중에 시기가 지나 동력이 사라진 사안들이 있습니다. '고 손○○군 사건 CCTV공개와 함께 과학적인 재수사 엄중촉구에 관한 청원'이나 '22년 3월 대선에서 수개표 시행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에 관한 청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의사·한의사·간호사·진료보조인력 등 직역 간 갈등으로 이어질 우려가 큰 내용이나 여성 군복무·낙태죄 존폐·차별금지법 반대처럼 사회적 갈등이 청원의 형태로 폭발한 경우에도 국회는 침묵을 선택합니다. 괜히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 일단 심사를 연장하여 미루고 보자는 심리입니다.
가뜩이나 바쁜데 폭탄을 피하고 싶은 국회의원들의 심정은 알겠지만, 계속 청원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버티는 것은 시민의 대표자로서 정치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청원에 대한 심사를 다룬 국회법 125조는 청원이 회부된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심사 결과를 보고하고, 특별한 사유로 심사를 마치지 못했을 경우 60일의 범위에서 한 차례만 심사기간의 연장을 요구할 수 있다고 정해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장기간 심사를 요하는 청원으로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심사기간을 추가 연장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는 것이 원칙이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심사기간을 연장하도록 한 것이 본래의 취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심사를 마치는 경우가 예외적이고, 대다수의 청원은 묵살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민동의청원 제도는 시민이 직접 입법 과정에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 내용이 어떠하건, 5만 명의 동의라는 형태로 청원이 성립한 이상 그에 대해 분명히 논의하고, 이를 반영하든 기각하든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져야 할 책임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토론과 논의를 회피하는 것은 국민동의청원 제도를 무력화하는 꼼수에 불과합니다.
<오마이뉴스>는 국민동의청원 제도 도입 초기부터 참여연대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등이 참여한 기획 '국민동의청원이 왜 이래'로 국민동의청원의 한계를 다룬 바 있습니다. 당시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었던 '10만 명' 기준은 5만 명으로 완화 되긴 했지만, '심사 미루기'를 방지하는 제도 개선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심사 연장', '계류 중', '임기 만료 폐기'로 끝나버리는 국민동의청원,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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