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대략 1890년 전후로 추정된다. 커피는 구수하고 향긋한 고유의 맛으로 곧 왕족들과 대신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기호식품이 되었고 이름도 영어발음을 따서 ‘가배차’ 혹은 ‘가비차’로 불렀다. 서민들은 커피를 보통 ‘양탕(洋湯)국’으로 불렀다. 검고 쓴 맛이 나는 커피가 마치 한약 탕국과 같아서이다.
우리나라에서 12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커피는 기호음료를 넘어 문화현상으로 진화했다. 유행가부터 드라마와 영화 어디에서도 커피가 빠지는 곳은 없다. 커피메이커를 사서 직접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제 커피는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커피는 생산자들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제품을 사는 공정무역의 대표주자로도 떠올랐다.
최영희 의원이 올해 3월부터 9월까지 청와대에서 구입한 물품 14억 4046만원 구입 내역을 공개했다. 대당 1500만원 디지털 카메라가 2대, 공기방울 쌀 씻는 기계 330만원, 야외용 파라솔 500만원 1개, 158만원 커피메이커가 들어 있다.
한 누리꾼은 청와대에서 구입한 물품을 옥션에서 가격을 비교한 내용을 정리해 올렸다. 무턱대고 싼 물건보다는 많이 판매한 물건들로 골라봤다는데 옥션에서 2400명이 구입한 커피메이커는 13900원으로 청와대 커피메이커 113대 분량이라고 한다. 또 다른 누리꾼은 춘추관 2층에 놓인 이탈리아 브랜드인 야외용 파라솔 사진과 211만원이라는 판매 가격을 올리고 청와대가 두 배 넘게 비싸게 샀다는 내용을 올렸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 블로그인 ‘푸른 팔작지붕’은 <청와대 물품 구입 논란, 사실은?>이란 글을 올렸다. 청와대 환경은 결코 ‘럭셔리’하지 않고 커피메이커는 취임 초 장관과 대통령도 ‘커피는 셀프서비스’로 바꾸면서 구입하였다는 것이다. 연결된 링크를 찾아가면 ‘커피 직접 타 마시고, 달라진 국무회의 ’란 기사가 뜬다.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이 직접 커피와 차를 타 마신다는 내용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커피메이커는 3만원에서 30만원 사이가 많지만 프랑스에서 만든 크룹스 커피메이커는 146만원이고 185만원과 236만원을 호가하는 이탈리아 드롱기 브랜드 같은 고급제품도 있다. 청와대 커피메이커도 비슷한 고급제품이다.
최고 권부인 청와대가 ‘격’을 유난스레 따지는 한국사회 정서를 감안해 제일 비싼 디카와 커피메이커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 전체 예산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 물품 구입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커피를 뽑는 기계가 다르면 맛도 다르다고 하니 장관들이 은은한 향을 풍기는 맛있는 커피를 음미하며 부디 국정을 잘 운용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왜 누리꾼들이 열심히 청와대 구입물품 가격 비교를 올리는지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1500만원 디지털 카메라가 있으면 국정을 더 잘 운용할 수 있는가? 고급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타서 마시면 과연 국민과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는가?
잣대는 두 가지다. 청와대 직원들이 나라 예산이 아니라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면 어떤 물건을 샀을까? 그래도 ‘품위’와 ‘격’만을 생각해 최고급 제품으로만 골랐을까? 구입하는 물품의 가격과 성능을 비교해서 최대한 돈을 아껴 제일 좋은 성능을 지닌 제품을 구입하려고 하지 않을까?
또 하나, 나라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실천을 최고위 부처 사람들이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청와대가 한 푼 한 푼을 아끼고 줄인 돈으로 민생예산에 쓴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0만원 커피메이커에 200만원 디카와 60만원 야외용 파라솔을 샀다고 말이다. 공직사회에서 청와대가 하는 모든 일은 표준이다. 청와대가 한 노력을 본받아 모든 부처에서 경상비를 아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예산을 아끼는 노력은 커피메이커와 디카와 파라솔로 끝나지 않는다. 내년도 정부 제출 나라 예산은 283조다. 이 엄청난 나라 예산 곳곳에 낭비와 허례와 비효율이 숨어 있을 것이다. 커피메이커와 디카 살 돈을 아끼는 마음이면 국정과제인 예산 10% 절약 고지도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 모든 부처가 그렇게 줄인 돈으로 처절한 생활전선에 내몰린 서민들을 쓰겠다고 나서고 그런 마음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지지율 10%는 더 올라가지 않을까? 나아가 한 정권의 지지율보다 더 중요한 우리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고질병인 정부와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상실이 줄어들지 않을까? 낡은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양탕(洋湯)국’ 한 잔을 마시면서 잠시 행복한 꿈에 젖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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