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우리들의 일그러진 민주주의

opengirok 2010. 9. 30. 14:33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평생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본 사람이 없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혹시 목소리를 냈다가 불이익을 받을 것도 걱정이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내가 겪고 있는 생활의 문제나 우리 동네의 문제가 무엇인지 한번 적어 보세요.”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분들이 차츰 종이 위에 적기 시작한다. 자기가 적은 내용을 발표하게 하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져 나온다.


 “우리 동네에는 임대주택이 너무 부족해요”, “청소년들이 갈 곳이 없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가 치료 받으려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요”, “대학생인 아이들의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요” 등등. 너무나 많은 삶의 문제들이 생생하게 터져 나온다. “지금 말씀하신 문제들에 대해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본 분 있으세요?” 아무도 없다. “아니면 지방의원이나 공무원에게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이야기해본 분 있으세요?” 역시 아무도 없다.

이 자리는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 ‘우리 동네 생활문제 해결하기’라는 주제로 진행하고 있는 워크숍이다. 이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에 속해 있는 분들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평생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본 사람이 없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혹시 목소리를 냈다가 불이익을 받을 것도 걱정이다. 그래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도 그냥 참고 산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겪어온 ‘해봐야 소용없다’는 경험들도 발목을 잡는다.

그나마 이런 워크숍에 참여하는 분들은 그래도 낫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이야기를 하고, 문제를 풀기 위한 작은 노력이라도 같이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포기하고 산다. 선거 때에 투표도 잘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은 아니다. 지방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지방의원이 된 순간부터 전화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지역에서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유지이거나 생활이 여유로울 정도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불만이 있으면 수시로 지방의원에게 전화를 하고, 공무원에게 민원을 내고, 심지어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까지 움직이려 한다. 당연히 투표도 열심히 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은 누구에게 신경을 쓸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기득권이 있는 사람들일까? 당연히 후자 쪽이다. 아마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계층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청년들 중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삶이 힘들어도 그 문제를 혼자서 떠안고 생활하기 바쁘다. 자기 문제를 사회를 통해, 그리고 정치를 통해 풀어볼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살기 힘들어서 참여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않아서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그래도 ‘참여’밖에 없다.

다시 워크숍으로 돌아가보자. 이번 워크숍 참여자들 중 몇 사람이 처음으로 구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임대주택을 늘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구청에서 답변을 받았다.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검토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글을 올린 분들은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다.


- 이 글은 '위클리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