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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베일 속 국가 '비밀관리'… 폐기해도 알 길 없어

opengirok 2019. 4. 15. 16:38

10개 중앙부처 정보공개 청구 / 기록물 숫자조차 모두 비공개 / 생산·해제·폐기 관리 ‘사각지대’ / 국가기록원의 통계마저 엉터리 / 盧정부 때보다 ‘알권리’ 뒷걸음


세계일보 /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공동기획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⑮ 베일 속 국가 '비밀관리'… 폐기해도 알 길 없어



중요 국가기록 상당수가 사라져 ‘기록이 없는 나라’란 오명까지 들은 우리나라는 노무현정부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었다. 정부 차원에서 기록물관리에 적극 나서며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지위가 격상되고 대통령기록물관리법도 제정됐다.

접근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국가기관의 ‘비밀’이 국민 시야에 들어온 것 역시 그 무렵이다. 정부는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공공기관들이 비밀의 생산 현황 등을 국가기록원에 통보하도록 의무화했다. 비밀기록물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사각지대’라는 지적을 받아들인 결과다. 국민 알권리를 강조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대다수 공공기관이 ‘관행’을 들어 비밀 생산 등 현황 공개를 꺼리는 것은 물론 국가기록원의 관련 통계마저 엉터리인 것으로 14일 세계일보 취재 결과 드러났다. 노무현정부를 계승해 ‘국민 알권리를 확대하겠다’고 한 문재인정부의 공언과 달리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는 게 현장의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각 기관의 비밀 폐기에 대한 감시가 불가능한 구조”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무조건 안 돼… 국가안보 모르세요?”

취재팀이 최근 감사원·경찰청·국방부·국가정보원·기획재정부·대검찰청·법무부·외교부·통일부·해양경찰청 10개 중앙부처에 연도별 비밀기록물의 생산·보유 현황 등의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공개’를 통보한 기관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며 즉각 비공개 처리했다. 감사원만 “내부 검토를 더 해보겠다”며 한 차례 기한을 연장했다가 결국 비공개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A기관 관계자는 “비밀과 관련해선 (수치든 목록이든) 어떠한 것이라도 비공개가 원칙”이라며 “국정원 지침이 그렇다”고 선을 그었다. B기관은 “비밀 생산이나 폐기 현황 공개는 곧 기관의 역량 노출”이라며 “어느 해에 비밀이 많이 생산됐는지도 알려지면 (국가 차원에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물론 국가 기밀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비밀기록물 숫자를 국가안보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비밀주의’란 지적이 제기된다. 해당 수치를 국가기록원에 상세히 남기도록 한 법 취지와도 거리가 멀다.

기관 스스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해 비밀에서 해제한 기록물 숫자나 그 목록조차 감추는 건 알권리를 강조하는 정부 기조를 감안할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C기관은 “비밀을 해제한 것과 공개 여부는 다른 차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공개를 위해 따로 심의나 회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취재팀 질문에는 “없다. 관행적으로 공개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만 답했다.



이는 노무현정부 시절과 비교해 되레 후퇴한 모습이다. 2007년 세계일보는 비밀을 1건이라도 생산한 22개 중앙행정기관의 1998∼2006년 비밀기록물 생산 현황을 입수해 보도했다. 이듬해 통일부, 외교부 등은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청구에 따라 과거 비밀이었다가 일반 기록으로 재분류한 목록 일부를 공개했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비밀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따져보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며 “각 기관들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비밀 해제 목록은 (비공개이더라도) 제목을 가리거나 가명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법적 안전장치가 존재한다”며 “무조건적 비공개는 행정소송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엉망진창’ 국가 비밀기록 통계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니 국가의 비밀관리 체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취재팀은 국가기록원의 ‘중앙행정기관 기관별 비밀기록물 생산·보유 현황’을 입수해 확인했다. 이는 시민이 국가의 비밀 규모에 접근할 유일한 통로로 여겨진다.

분석 결과 법률에 근거한 국가 통계임에도 수치가 엉망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지난해 경찰청은 2017년 ‘1급 비밀’을 735건 생산했다고 통보했다. 통상 1급 비밀이란 전쟁처럼 국방과 외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정작 국방부는 최근 수년간 한 건도 만들지 않은 1급 비밀을 경찰청이 수백건 생산했다고 통보한 셈이다.



이에 경찰청은 “실무자의 착오인 듯하다”며 “숫자를 확인해 국가기록원에 다시 현황을 보내겠다”고 취재팀에 밝혀왔다.

비밀이 갑자기 폭증하거나 사라지기도 예사다. 외교부는 2013년까지 매년 비밀을 5000건 안팎 생산하다가 2014년 갑자기 2만2000건 넘는 비밀을 생산한 것으로 돼있다. 그런데 외교부가 2014년 국가기록원에 통보한 비밀 보유 현황은 2013년의 6만4612건보다 74% 줄어든 1만7145건에 그쳤다. 비밀 생산은 폭증했는데 보유 수치는 되레 줄었다는 것으로 이해가 쉽지 않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12년 51건이었던 비밀 보유 현황이 2013년 4098건, 2014년 8370건으로 크게 늘었으나 2012년과 2013년 비밀 생산은 각각 498건, 470건에 불과했다. 해양경찰청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각각 180건, 2332건, 168건 생산했다고 통보했다.



미통보는 물론 잘못 기재한 사례도 눈에 띈다. 방위사업청은 2013, 2014년 통계를 보면 6개 항목 현황이 한 자리 숫자까지 전부 똑같아 오기로 의심된다. 경찰청은 유독 2013년만 전체 비밀 현황이 모두 ‘없음(-)’으로 돼 있다. 다른 기관들 중에도 현황이 연도별로 몇 군데씩 빠진 곳이 있다. 취재팀의 문의에 국방부 등 일부 기관은 “(대외비를 포함한) 비밀기록물 생산이 그렇게 적을 리 없다”며 되레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딱히 강제할 근거가 없다 보니 (통계가 의심스러워도) 기관에서 알려주는 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며 “내부적으로 회의적 시각이 많다”고 털어놨다. 행안부령으로 정해진 통보 서식은 비밀기록물 목록을 일일이 쓰도록 돼 있으나 연간 10건 안팎을 생산하는 일부 기관을 빼면 제대로 목록을 보낸 기관이 없다는 점도 취재 결과 확인됐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비밀담당 부서와 기록관리 부서가 분리돼 있고 서로 동등한 지위가 아니란 점에서 원인을 찾는다. 앞선 취재팀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비밀담당 부서들은 “각 부서별로 생산 현황을 다시 취합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에 박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법으로 규정된 비밀 목록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 기록관리 담당자는 “(비밀담당 부서와 협의 없이) 전산망을 검색해 나온 수치를 국가기록원에 통보하는 식”이라며 “모든 비밀 목록을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소장은 “비밀기록 통계 무용론은 오래전부터 나오던 얘기”라며 “이런 비밀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각 기관이 생산한 비밀들이 어떠한 감시나 기록 없이 자체 파기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문서처럼 비밀도 공개해야…”

일각에서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외교문서의 공개를 들어 국정원 등 정보기관을 포함한 국가 비밀문서들도 모두 공개돼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정부는 1994년부터 매년 외교부령에 따라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를 심의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7년 11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주범 김현희를 같은 해 12월 대선 전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점이 최근 알려진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국민 알권리를 위해 외교문서들을 공개하는데 그 비율이 88% 안팎”이라며 “심의에서 비공개 결정이 나더라도 5년 뒤 재심의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등이 생산한 비밀 문서라도 30년가량 지나면 엄정한 심의를 거쳐 전 세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온라인에 공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제도가 전무하다.

김익한 교수는 “세계적으로 보면 ‘생산 후 30년’을 기준 삼아 비밀기록물을 공개하는 추세”라며 “직접 활용도 가치가 있지만 이렇게 공개 절차를 마련해두면 기관들의 비밀기록물 무단 폐기와 부실 관리에 경각심을 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팀장)·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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