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의원 기록물 / 국회의원·의원실 관계자 대부분 / 기록관리 매뉴얼 존재조차 몰라 / “파쇄만 잘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 청문회 장관 후보자 사적 정보 담긴 / 문건도 세단기 안거치고 그냥 버려 / “안해도 되는데 번거롭게 왜 하겠나” / 법적 이관대상 아냐 수집 등에 애로 / 대통령 기록물처럼 특별법 필요성 / “의원들 기록관리 중요성 깨달아야”
세계일보 /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공동기획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⑫ ‘역사가 사라진다’… 기준도 없이 버려지는 '의원 기록물'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습니다.’
2016년 11월 국회기록보존소가 만든 ‘국회의원 기록관리 매뉴얼’ 첫 페이지에 적힌 문구다. 민주주의와 의정활동의 투명성,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 기록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내용이다. 개개인이 하나의 독립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의정활동 기록은 기록 유산으로서 가치가 상당하다.
현실은 어떨까.
“기록 관리요? 파쇄만 잘 하면 된다고 배웠는데…” 31일 세계일보 기자들이 국회의원과 의원실 관계자들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를 종합하면 대부분 해당 매뉴얼의 존재 자체를 모를 뿐더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인식도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철저한 파쇄’가 거의 유일한 기록 관리 지침이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특별법에 따라 매년 200만건 넘게 남겨지는 대통령 기록물과도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해 그간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으나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국민 알권리는 물론 기록물관리 차원에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안 해도 된다는데 누가 하겠어요?”
국회사무처가 관리해 비교적 잘 남겨지고 있는 국회 회의록과 달리 의원실에서 취급하는 문서들은 아무런 관리 체계가 없다. 심지어 같은 의원실에서 생산하는 문서도 작성 양식이 제각각이다. 보존기간이나 폐기 등 규칙은 사실상 전무하다. 행정부처를 대상으로 한 자료 요청 기록 등이 일부 시스템에 남긴 하지만 의원실 스스로 만들거나 외부로부터 받은 문서들은 남는 게 거의 없다.
현행 ‘국회기록물관리규칙’은 결재 및 보고·검토 문서와 회의록 등 관리 대상을 쭉 열거하면서 개별 의원 기록에 관한 내용은 뺐다. ‘그 밖에 국회도서관장이 국회 기록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기록물’이란 단서 조항이 있으나 실무에선 ‘무용지물’이다.
이런 현실은 취재팀이 확인한 ‘국회전자문서시스템 생산·접수 현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국회는 기록관리 및 활용을 위해 2004년 전자시스템을 도입했다. 19대 국회의 경우 이 시스템을 통해 국회사무처와 국회도서관이 각각 39만건과 10만건의 문서를, 예산정책처와 입법조사처가 각각 6만건과 4만건을 생산했다.
반면 의원실이 등록한 문서는 17대 국회 4454건을 시작으로 18대 7946건, 19대 8777건에 그쳤다. 현 20대 국회도 여태껏 등록된 게 6500건 정도다. 의원실별로 따지면 연 평균 7.6건 꼴이다. 의원실 관계자가 3000여명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적다. 사소한 문서 하나라도 모두 남기게 돼 있는 행정부나 사법부와도 차이가 상당하다.
취재팀이 만난 의원실 관계자 20여명은 “(해당 시스템 존재를) 들어봤지만 직접 써본 적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비서관은 “사무처에서 정책개발비를 지원받아 만드는 것들은 기록물로 등록한다”면서도 “우리 의원실의 경우 귀찮아 그런 책자를 아예 안 만든다”고 귀띔했다. 또다른 비서관은 “의원실은 팩스로 공문이 오가는 시스템”이라며 “안 해도 되는데 누가 그걸 번거롭게 온라인에 다시 올리겠느냐”고 되물었다.
◆마구 버려지는 의원 기록물들
“딱 두 가지예요. 개인정보가 있으면 파쇄, 없으면 쓰레기통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원 기록물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 버려지고 있다. 취재팀이 최근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전후로 나흘간 의원회관과 본관 의원실 주변, 쓰레기 집하장 등을 살펴본 결과 각종 의정활동 자료가 매일 산더미처럼 버려지고 있었다.
‘대외비’라고 명시된 정책보고서를 비롯해 행정부처에서 받은 자료집과 국정감사 계획, 정치후원금 수납 기록, 공공기관 감사결과, 외부용역 보고서, 수사 관련 기록 등 문서가 5∼6시간 간격으로 청소 카트에 실려 나왔다. 의원회관 지하 4층 쓰레기장 구석에는 정책자료집 등 책자 수백권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였다.
인사청문회 당일은 장관 후보자와 그 가족의 주민등록번호 등 사적 정보가 담긴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 이 ‘쓰레기’ 더미 속에는 심지어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등이 의원실에 보낸 후보자 관련 문서들도 있었다. 일부 문건은 ‘(열람 후) 반드시 파쇄하라’는 문구가 표지 안쪽에 적혀 있었다. 기록물 담당 공무원이 모든 문서의 폐기 여부를 결정하는 일반 부처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이다. 국회 기록물 관리 체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10년 넘게 국회에 근무한 한 비서관은 “기록물 생산이나 보관은 전적으로 보좌진 몫”이라며 “‘잘 파쇄하라’는 것 이외엔 따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15년 넘게 일했다는 다른 보좌관도 “기록물관리와 관련해 승진이나 인사 불이익 등이 전혀 없는데 누가 잘 하겠느냐”며 “그동안 이 문제를 지켜보기만 한 사무처나 도서관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꼬집었다.
◆“의원 기록, 선의에만 맡겨선 안 돼”
그나마 의미가 있는 의원 기록물은 국회기록보존소 측에서 임기 말 불출마 또는 낙선 의원실로부터 넘겨받는 자료가 유일하다. 이마저 ‘기증’ 형식인 탓에 그다지 많은 양이 남겨지진 않고 있다.
취재팀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제19대 국회 의원기록물 수집 결과 보고’에 따르면 국회기록보존소는 19대 국회 마지막해인 2016년 3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넉달간 의원회관을 비운 140여개 의원실을 상대로 기록물 수집활동을 벌였다. 담당 연구관 2명이 의원실을 방문해 기록물 기증제도를 설명하고 의사를 밝힌 의원과 협약을 맺은 다음 자료를 넘겨받았다.
그 결과 전체 146개 의원실 중 20곳(13.6%)만 기증 의사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11명,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정의당이 각 3명, 국민의당(현 바른미래당) 2명, 무소속 1명이 157상자 분량의 기록물을 넘겼다. 4년간 활동한 19대 국회가 남긴 의정활동 자료치고는 너무 적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대다수 자료는 의원 자신한테 유리한 내용 위주로만 구성됐다. 보고서 역시 이 점을 지적하며 ‘의원기록물의 경우 법적 이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또 ‘수집업무 담당자가 2인에 불과해 체계적인 수집·정리에 어려움이 크다’고도 했다.
국회기록보존소 관계자는 “몇몇 의원의 적극적 협조 덕분에 일부 의미있는 기록이 국회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면서도 “20대 국회가 어느 정도의 기록을 남길 것인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대통령기록물법 등 선례에 비춰 국회도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은 “국회의원이 남긴 기록은 역사적으로 모두 가치있는 것들”이라며 “언제까지 의원들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겨진 기록물이 자칫 ‘부메랑’이 돼 의원 자신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당 소속 A의원은 “기록관리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면서도 “법안을 발의하려 해도 당장 우리 당 의원들조차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록은 결국 활용하려고 남기는 것이지만 현재로선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라며 “의원들이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면 쉽게 바뀌지 않을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팀장)·김민순·이창수 기자, 최형창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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