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노리벤 문서'와 '백지 영수증'

opengirok 2023. 7. 12. 13:20

정보공개센터 김예찬 활동가가 은평시민신문에 연재하는 정보공개 칼럼입니다.

 


 

몇 년 전 한 검사 출신 법조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정보공개와 기록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시민단체에서 일한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검사들이 기록을 얼마나 엉망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하더군요. 문서들이 노끈으로 묶인 채 지청 건물 복도와 창고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는데 이 문서들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기록관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검사 본인이라서 혹시라도 문서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검사라면 수많은 문서를 다루는 직업인데 왜 기록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 이 대화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6월 23일, 드디어 3년이 넘는 정보공개 소송 끝에 검찰의 예산 자료를 받았는데, 2017년 1월부터 5월까지 집행된 특수활동비 74억 원에 대한 자료가 모두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검찰은 “그 시기의 자료가 없다”는 말과 “가지고 있는 자료는 모두 공개했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애초에 자료를 만들지 않았거나, 분실했거나, 무단으로 폐기했거나 셋 중 하나일 텐데 어느 경우가 되었든 일단 납작 엎드려서 사과부터 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모르는 일이라고 일관하는걸 보니 검찰의 기록관리 수준이 정말 엉망이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리벤 도시락과 노리벤 문서




일본에는 ‘노리벤 문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숨기기 위해 문서를 검게 칠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노리벤은 밥 위에 김을 얹은 도시락을 뜻합니다. 중요한 정보를 검게 칠한 문서가 마치 흰 밥이 검은 김으로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리벤 문서’라는 별칭이 생겼습니다.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 당시 공개된 ‘노리벤 문서’. 971장의 서류 중 729장이 온통 먹칠 상태다.




일본 정부의 정보 은폐 관행을 비꼬는 ‘노리벤 문서’는 아베 신조 총리의 측근이 연루된 부패 스캔들인 모리토모 학원 사건을 계기로 유명해졌습니다. 201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측근이 운영하는 학교인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매각하기 위해 정부 고위 관료들이 공모한 사실이 드러났고 언론은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입수한 971건의 문서 중 무려 729건의 문서가 ‘노리벤’ 상태로 편집된 채 언론에 공개되었고 시민들은 노골적인 정보 은폐 행각에 분노했습니다. 심지어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스캔들을 은폐하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는 막장 행각을 펼쳤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이 스캔들은 정권 퇴진 시위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 ‘노리벤 문서’가 있다면, 한국 검찰에는 ‘백지 영수증’이 있습니다. 검찰이 공개한 업무추진비 증빙 영수증 사본의 절반 이상이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글씨가 하얗게 날아간 ‘백지 영수증’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검찰 구내식당 영수증만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검찰은 시간이 오래 지나 원본 영수증도 잉크가 다 날아가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애초에 예산 집행 증빙 자료를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6월 23일 검찰이 공개한 업무추진비 집행 증빙 영수증 사본



 
2019년 드러난 ‘벚꽃을 보는 모임’ 스캔들은 아베 신조 총리에게 큰 타격을 입힌 사건이었습니다. ‘벚꽃을 보는 모임’은 봄마다 총리대신이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하는 연례행사입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 취임 이후 이 행사에 초청 인원이 몇 배씩 늘어났고 행사 예산도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아베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지역구민 수백 명에게 초청장을 뿌리거나 자신의 지지자라면 범죄자나 야쿠자도 초청자 명단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정부의 공적인 행사를 완전히 사유화한 것이죠.

게다가 야당이 진상조사를 위해 행사를 주관하는 내각부에 초청자 명단을 요구하자 내각부가 그 날 즉시 명단을 파기했다는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세금으로 진행하는 공적인 행사를 사적으로 활용한 것은 물론 증거 인멸을 위해 공문서 무단파기를 불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연달아 드러나면서  내각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고, 곧이어 건강 문제가 겹쳐 아베는 결국 총리직을 사임하게 됩니다.

최근 검찰 특수활동비에서 드러난 문제들은 여러모로 ‘벚꽃을보는모임’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래 검찰 특수활동비는 기밀유지가 필요한 수사나 정보 수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하지만 막상 집행 내역을 살펴보니 상당한 액수의 특수활동비가 검찰 기구와 특정 직위의 인사들에게  정기적으로 입금되고 있었습니다. 수사나 정보수집과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계좌에 꽂히는 돈이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검찰총장이 따로 현금 금고를 마련하여 별다른 심의나 감시 없이 마치 쌈짓돈처럼 임의로 특수활동비를 써왔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특수활동비가 검찰총장의 ‘통치자금’이 되어 자신에게 충성하는 검사들에게 현금 봉투를 건네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일고 있습니다. 그동안 검찰이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면서 특수활동비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자료 상당 부분을 먹칠하면서 가렸던 것은 이런 특수활동비의 사유화 관행이 드러날까 그랬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일부 특수활동비 기록이 아예 사라진 것 역시 매우 수상한 일이구요.

 

뉴스타파가 취재한 검찰총장의 특수활동비 사유화 관행


공공기록물법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업무의 시작 단계부터 종료 단계까지 업무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기록을 생산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기록물의 성격에 따라 보존기간이 정해져 있고 보존기간이 지난 기록물을 폐기할 때는 기록물평가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록을 폐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검찰의 특수활동비 집행 증빙 자료 역시 공공기록물입니다. 만약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단으로 기록이 폐기 되었다면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꼭 이뤄져야 합니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기록을 없앴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비밀주의와 정보은폐, 오랜 관행 속에서 검찰총장의 쌈짓돈으로 전락한 특수활동비 제도를 갈아엎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