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햇빛은 어디에 필요한가 -정보공개센터의 뿌리를 찾아서-

opengirok 2013. 8. 12. 11:13

1998년~ 선샤인 프로젝트




공공기관장의 업무추진비 공개 운동으로 시작한 선샤인 프로젝트는 2001년 새로운 시도를 꾀한다. 정보공개 실태조사 과정에서 공개할 정보, 즉 국가 기록물이 제대로 생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국가정책 결정과정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회의록 공개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국무회의 기록물 작성에 대한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는 청와대 앞 시위는 조선시대 사관 복장을 한 시민이 1시간 동안 침묵 퍼포먼스를 하는 것인데, 이는 정부가 회의 기록을 못하겠다면 시민이 사관이 되어 역사를 남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평화로운 1인 시위 임에도 취재진들의 접근을 막았고 급기야 시위 중이던 최한수 간사를 강제연행했다. 참여연대는 곧바로 이를 규탄하는 논평과 항의 방문을 했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하는 성과를 얻었다.


스웨덴은 1766년에 정보공개제도를 마련했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세상에 공포되기 33년 전의 일이다. 고도의 정치 행위라는 이름 아래 사사로운 접근이 금지되던 정부의 행정도 햇빛보다 더 강렬한 국민의 눈총 아래 펼쳐져야 한다는 제도가 선을 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빛에 의존해 세운 지상의 나머지 국가들은 여름에 해가 지지 않는 북반구 위쪽의 바이킹 후예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몸짓 정도로 여겼던 모양이다. 스웨덴에 이어 두 번째로 그 제도를 받아들이는 국가가 바로 이웃에서 나타나는 데에는 무려 16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951년의 핀란드에 이어 다시 15년 뒤에 미국이 정보공개제도를 법으로 갖추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정보공개법이 제정된 것은 1996년이다. 그나마 인터넷 검색 기능의 발달로 ‘정보공개’라고만 쳐도 법령이 나타나지만, 웬만한 관심으로 외우지 않는 한 보통사람이 기억하기에는 힘겨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정식 명칭이다.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정보공개법이다. 아무래도 긴 이름보다는 짧은 이름이 낫다. 앞에 굳이 ‘공공기관’ 따위를 뙤약볕 아래 털모자처럼 덧씌워 놓은 것은, 개인의 정보는 공개 대상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국회의 친절이 반영된 결과라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뒤로는 공공기관의 모든 정보가 밀실의 암흑에서 뛰쳐나와 양지의 광선 아래 펼쳐졌는가?




정보공개사업단은 1998년부터 시행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을 활용하여 시민의 참여로 정부의 행정과 예산운용 감시,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1998년 5월 19일 발족했다.


청주시 조례로 시작된 정보공개제도

 

정보는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국가권력을 감시하는데 정부종합청사나 국회의사당 건물 주변에 둘레길을 만들어 돌아다니며 불침번을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보가 있어야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원하는 정보를 볼 수 있어야 평가가 가능하다. 필요한 정보가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아야 보자고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이 성취되지 않으면 참여민주주의는 그 문턱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의 정보공개제도는 법이 제정되기 전에 청주시의회 조례로 먼저 시행이 됐다. 진취적 기상을 지닌 청주의 시의원들이 주도해 시장과 사전 협의 없이 기습적으로 발의해 통과시켰다. 아마 그들은 미국의 정보공개법이나,  법 제정은 우리보다 많이 늦었지만 일찌감치 지방자치 조례로 시행하고 있던 일본의 사례에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정보공개에 관한 논의와 흐름은 존재하고 있었다. 1984년에 개정한 대통령령이었던 정부공문서규정은 일반인이 행정기관의 문서를 열람하고 복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정보공개제도의 실마리에 불과했다. 1992년 말 대통령 선거전에서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정보공개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1996년 세밑에 법률이 공포될 때까지는 경실련이 여론을 이끌었다. 

 


선샤인 프로젝트, 서울시장 판공비를 들추다

 

정보공개제도가 절실한 것은 참여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법이 제정될 때까지 적극적인 입법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1989년에 창설한 경실련이 처음부터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중에 끼어들어 성과의 일부라도 가로채는듯한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법률이 시행된 1998년 1월 1일 이후에도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사무처장이었던 박원순이 이태호에게 말했다. “정보공개법이 시행됐는데, 제대로 활용하고 있어요?” 즉시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맑은사회만들기 운동본부 안에 정보공개사업단을 꾸렸다. 단장은 변호사 최은순이었고, 하승수와 이상훈이 도왔다. 격려인지 채찍인지 박원순은 그들의 어깨 위에 짐을 하나 얹어주면서 근사한 이름을 붙였다. ‘선샤인 프로젝트’, 정보를 광장의 양지에 내놓자는 것이었다. 

 

사업의 첫걸음은 공부였다. 우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알아야 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시작한 세미나 형식의 연구 교재는 일본 변호사회에서 만든 『정보공개』라는 책자였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주요 공공기관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알아보자고 합의했다. 







참여연대는 2000년도 하반기부터 정보공개사업단을 납세자운동본부로 확대해 예산감시를 특화하고, 산하에 시민예산감시모임인 ‘나라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을 두어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예산감시 운동을 펼쳤다. 

1999년 6월 발족한 ‘나라곳간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은 서울시장의 판공비(업무추진비) 공개 운동, 서울시 25개 구의회 의원들의 해외연수 실태 조사 및 예산낭비 평가 보고서 발표 등의 활동을 펼쳤다.

참여연대는 2000년 6월 29일 지방에서 예산감시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들과 ‘판공비공개운동 전국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전국 132개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일제히 정보공개청구를 실시했다. 결과를 바탕으로 정보공개 성실도를 평가하고 순위를 매겨 발표하고 전부 비공개 또는 부분 공개를 결정한 지자체들을 상대로 전국적인 소송을 진행했다. 2002년 5월 그간의 활동 경과를 담아 판공비공개운동백서를 발행했다. 


한때 판공비란 출세한 공관장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권위와 여유의 상징으로 알았다. 공무에 사용하는 돈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장’급의 공무원이 월급 외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으로 알았고, 판공비가 많을수록 좋은 자리로 여겼다. 목표를 정하고 관련 정보의 공개를 청구하려다 보니 판공비의 공식 명칭이 ‘업무추진비’란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첫 대상자는 서울시장이었다. 1998년 11월에 시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라고 청구했으나, 서울시는 난색을 표하며 응하지 않았다. 정보공개사업단으로서는 법에 정해진 대로 즉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도중에 서울시는 자발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결과는 미흡했다. 쟁점은 단순히 지출 금액이 얼마냐가 아니라 업무추진비 사용과 관련한 인물의 인적 사항까지 밝혀야 하느냐였다. 1심은 정보공개법의 체면을 살리는 정도에 그쳤으나, 서울고등법원은 전적으로 참여연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시 그 범위를 축소하여, 공개해야 할 정보의 구체적 범위에 대한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초창기 대법원의 판례를 비롯한 모든 현상이 정보공개 초보자들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은 환경운동연합 대표 출신으로 평소 시민단체에 우호적이었지만, 막상 청구당한 정보를 공개하자니 준비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처 정돈하지 못한 자료를 내놓을 수도 내놓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기회에 정보공개법 시행에 맞추어 공공기관의 준비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하기로 했다. 도대체 정보공개 청구 접수를 위한 창구는 있는가, 문서 목록은 비치했는가, 전담 공무원은 배치돼있는가 등 여러 기관에 동시다발로 시험적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 부처별로 정보공개에 대비한 수준을 점수화해 발표했는데, 꼴찌는 국방부였다. 

 


나라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

 

정보공개 사업은 행정감시와 아울러 예산감시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됐다. 1999년 6월 참여연대 회원 출신으로 상근자가 된 최유미가 회원들 30명을 중심으로 곳지사(나라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를 출범시켜 정보공개 사업을 측면 지원했고, 이듬해 2월에는 전국 12개 단체가 연합하여 판공비공개운동 전국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참여연대에서도 정보공개사업단과 조세개혁팀을 합쳐서 납세자운동본부 내에 예산낭비감시사업단을 출범시켰다. 

 

전국에서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거부하고, 끝내 소송을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여 어느덧 일상의 일부가 되어 갔다. 그것은 마치 민주화 물결의 한 줄기라는 것을 과시하듯 사회 전반에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보공개법을 탄생시킨 것은 다른 단체의 덕분이었으나, 그 제도를 민주 사회의 궤도에 진입시킨 것은 참여연대였다. 대신 그 파도의 소리에 묻혀 유심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정보공개사업단의 일거리를 도맡아 소송에 지쳐버린 변호사들의 아우성이었다. 그 소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한 사람은 1999년 참여연대에 들어와 납세자운동본부 일을 맡았던 이경미였다. 

 


청와대 앞에 등장한 조선시대 사관

 

필요한 정보를 청구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드문 현상이 아니라 필요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됐다고 판단할 즈음, 정보공개사업단은 운동의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첫 번째 시도한 변화는 2000년 연말에 시작한 회의록 공개운동이었다. IMF 구제금융의 치욕을 당한 뒤에 열린 국회청문회에서 외환위기를 자초한 경위를 밝히려 해도 관련 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2001년 여름에는 구체적으로 국무회의 속기록 작성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정보공개 청구를 하다 보니 보관해야 할 정보 자체의 생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매일 한 사람씩 조선시대 사관 복장을 하고 청와대 진입로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정보공개 운동의 두 번째 변환은 자연스럽게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 상태의 감시와 정상화 촉구로 이어졌다. 2003년 5월부터 중앙 행정기관 몇 곳을 선정해 정보공개를 통해 기록물 관리 실태를 조사했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기록물 관리를 법에 정한 대로 하고 있는 기관이 드물었으며, 비밀의 분류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음해 6월엔 세계일보와 손잡고 <기록이 없는 나라>란 제목으로 9회에 걸쳐 기획 기사를 보도했다. 미개척 분야라 할 수 있는 기록의 생산과 관리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마침 그 즈음 사상 초유의 탄핵소추를 당해 직무에서 잠시 손을 놓고 사색에 빠져 있던 대통령 노무현이 참여연대의 운동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그는 업무에 복귀하면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 기록전문분과위원회를 설치했다. 다음해엔 대학의 기록관리학과 졸업생 50여명이 중앙부처에 기록전문요원(기록연구직 6급 상당)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기존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외에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따로 제정된 것도 거기서 연유한다고 보면 된다. 

 


정보공개운동 전문 단체의 탄생

 

정보공개사업단은 그렇게 몇 번의 불을 지피고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단체나 개인이 필요하면 스스로 정보공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대구에서 상경해 10대 1의 경쟁을 뚫고 참여연대 문을 여는 데 성공한 전진한은 불만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라도 정보공개 청구를 전문화한 운동을 해보고 싶었다. 혼자 공부를 시작하고, 하승수를 만나 의논도 했다. 2006년 6월 참여연대에 사표를 낸 뒤 본격 준비 작업에 들어갔고, 2008년 10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를 창립하기 전까지 혼자 시험 삼아 1년에 500여건의 정보공개를 청구하기도 했다. 

 

전진한은 새로 시작하는 운동을 가능한 참여연대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 보자는 원칙을 세웠다. 우선 논평, 성명, 보도자료를 일절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집회와 시위도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연대활동은 사양한다고 선언하고, 내부적으로는 블로그에 올리는 내용에 대한 결재 제도를 없앴다. 창조성을 해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후에 틀린 것이 있으면 그때 쿨하게 고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유용하고 가치 있는 정보를 수집해 블로그를 통해 제공한다. 회원에 대한 특전으로 조만간 공개할 정보의 내용을 예고편으로 미리 알려준다. 매월 2만 원 이상 회비를 내는 회원들이면 그들이 원하는 정보가 있을 경우 공개 청구를 대신해주기도 했다(작은 시민단체는 이런 서비스가 없으면 회원가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발굴해 제공하는 정보는 기사, 논문, 사회운동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탐사보도 전문 단체인 뉴스타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참여연대에서 의도적으로 독립한 단체는 아니지만, 참여연대에서 시작한 정보공개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전문화하여 정착시킨 대표적 성공사례다. 

 

정보는 공개를 전제로 한다. 공공기관의 정보일수록 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정보를 생산해야 필요에 따라 공개할 수 있다. 생산의 수단은 기록이고, 중요한 기록일수록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비밀 보장이 절대적 조건이다. 공개와 비밀 보장 사이에 정보가 명멸한다. 우리가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은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2013년 8월호, 참여연대"햇빛은 어디에 필요한가: 1998~ 선샤인 프로젝트"로 게제된 글이며 정보공개센터의 창립배경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기에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