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활동/서교동 칼럼

시민들의 알 권리, 정부의 기록할 의무

opengirok 2013. 4. 15. 15:34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저는 얼마 전 부터 건강을 위해 현미채식을 시작했습니다. 육류와 어류, 밀가루 음식, 흰쌀, 술 담배, 음료 등을 모두 멀리해야 합니다. 솔직히 하기 싫을 때가 많습니다. 술도 마시고 싶고, 국수도 먹고 싶고, 고기도 뜯고 싶습니다. 하지만 맘껏 먹을 수가 없습니다. 채식 기간 동안 식사일기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뭘 먹고 있는지 꼼꼼하게 적어야 하는데, 거짓말로 쓰기엔 마음 한구석이 켕겨서 말이지요. 게다가 그 채식일기는 혼자서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맘대로 먹고, 거짓말로 식사일기를 적을 수 없습니다. 어느 샌가 건강이 아닌 일기제출을 위해 채식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나름 힘겹게 채식일기를 쓰면서 기록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부담스러운 행위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무언가 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지는 일. 필요한 일이고, 유용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록으로 남기는 게 달갑지 않을 때도 있고, 기록 때문에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기록이 보고되고, 공개되고, 평가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필요합니다. 만약 식사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요식업계를 주름잡으며 주지육림에 빠져있을 게 뻔합니다. 제 채식 실천의 8할은 채식일기 기록의 의무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처럼 식사일기를 쓰는 것에서부터 식당이나 가게에서 카드를 긁는 것, 직장 상사에게 결재를 받는 것, 국가 간 FTA(자유무역)협상까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기록의 의무와 책임이 따라옵니다. 이것은 정부가 하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아니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지요. 정부는 세금이라는 공공의 돈을 가지고 공공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기록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기록으로 안 남기려 꼼수를 쓰거나, 아니면 기록을 남기지 않거나 없애버리고는 배째라 식으로 버티는 모습을 목격하기 일쑤입니다.


몇 년 전 MB정부의 민간인 사찰문제가 떠들썩했습니다. 시민사회 각계에서 문제제기를 했고, 그 결과 진위를 조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조사와 책임자 추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국무총리실이 민간인사찰기록이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를 무단으로 삭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자정부법을 보면 ‘행정정보의 처리업무를 방해할 목적으로 행정정보를 위조, 변경, 훼손하거나 말소하는 행위를 할 경우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록물관리법에는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고, 형법에서도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국무총리실이 무단으로 기록을 폐기한 행위는 대충 적용할 수 있는 처벌규정만 합해 봐도 형량 22년에 해당하는 중범죄입니다. 실제 하드디스크를 파기하고, 자료들의 무단삭제를 실행한 사람은 한낱 공무원 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 왜 이런 일을 감행했을까요? 해당기록이 남아있어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기록을 없애 버리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의무를 비껴간 꼼수들


이 밖에 기록 의무를 비껴간 꼼수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1년.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장은 업무추진비를 집행하면서 유독 49만 원짜리 영수증을 많이 끊었습니다. 어떤 날은 한 식당에서 두 번에 걸쳐 결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기획재정부의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집행지침’에 따르면 업무추진비를 50만 원 이상 집행할 때에는 주된 상대방의 소속과 성명을 반드시 기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시중 전 방통위장의 꼼수로 우리는 그가 누구와 그 비싼 호텔 일식집에서 밥을 먹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기록의 의무는 이렇듯 여러 가지 일과 행동에 구속력과 책임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겨진 기록은 시민들의 알 권리와 직결됩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실은 어떻게든, 또 시일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세상에 공개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켕기는 일일수록, 꿍꿍이가 있는 있을수록 사람들은 기록하기를 꺼립니다. 기록을 하더라도 남기지 않으려 합니다. 기록으로 남기더라도 최대한 공개하지 못하도록 꽁꽁 숨깁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했습니다. 그가 재임기간에 생산한 기록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퇴임 후 그는 지금까지의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양인 1088만 건의 기록을 남겼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니 인터넷 홈페이지, 댓글 과 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실제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기록은 48만 건에 불과합니다(참고로 서울시가 2012년 한 해 동안 생산한 기록이 62만 건 입니다). 정말 기록을 제대로 남기긴 한걸까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수치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5년 동안 남긴 기록의 양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그나마도 이 기록들의 절반인 24만 건은 지정기록물로 분류해 향후 15년 동안 이명박 전 대통령 외에는 보기 어렵도록 해 놓았습니다. 4대강 사업, 민간인 사찰, 한미FTA 등 그가 재임시절에 했던 일들 중 재검토해야 할 게 부지기수인데 이런 상황에서 관련된 기록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기록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산적해있는 수많은 의혹들의 진상을 규명할 길도 요원합니다. 진위를 제대로 알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업무추진비 집행현황 중 일부



국가 업무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일 공공기록


알권리는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권리입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주권자로서 국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정보공개법에서도 국민에게 공공기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정보공개청구라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국가에 주권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가 독단적이고 폐쇄적으로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장치가 됩니다. 또한 공공기록의 철저한 관리를 통해 국가 업무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담보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알권리를 터부시 하는 경향 탓도 하지만, 기록자체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니 알려줄 거리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의무가 지켜지지 않으면 알권리가 충족될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이는 기록의 공개도 없고, 공개가 되지 않는데 알권리가 지켜질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정부 얘기를 계속해서 무엇 하겠냐 만은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알권리 암흑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정보공개가 후퇴했을 뿐만 아니라 기록의 의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젠 새 정부를 지켜볼 일입니다. 박근혜정부가 알권리를 지킬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전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전정부 반대로만 해도 알권리는 쑥쑥 올라갈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께 한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알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기록의 의무만 성실히 하시면 됩니다. 참 쉽죠. 켕기는 일,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참 쉬운 일. 그게 바로 기록의 의무를 지키는 일. 알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남들 다 쉽다고 하는 일을 당신만 어려워한다면, 문제겠지만요. 


* 이 글은 인권오름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정보공개센터는 4월부터 인권오름 <열려라 참깨>라는 꼭지를 통해 알권리 관련 칼럼을 연재합니다.